«RED SHIRTS»


2020.08.15 - 2020.09.13

장소: 을지로 오브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3가 156 5F)

참여작가: 정고요나, OSP, 이정빈
기획.글: 오웅진
글: 김지연
디자인: 오세애
촬영: 정지필





닿는다(tact)는 미신.

#Instagram 공개↔비공개
#Football 지구상에서 전쟁과 가장 유사한 스포츠
#Un-tact 라는 감미료에 관하여

몸이라니.. 생각해보면 이만큼 고전의, 그러나 동시에 현재진행형으로 돌진하는 고통이 없다. 언택트un-tact라는 말이 종종 들린다. (조금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전세계에서 우리만 쓰는 이 단어는(옥스포 드 사전에 untouched와 비슷한 intact정도가 있다만..) 현재 우리의 불안과 간절함의 감정 같은 걸 똘똘 뭉쳐 빚어낸 어떤 감미료 혹은 msg 덩어리 같다.

"무엇과 무엇이 닿을 수 있을까?" 시국과도 결부되어 시작된 고민이 '몸'까지 뻗었고 거기 멈춰 기획을 시작했다. 통신通信. 한자를 얉게 풀면 '통한다고 믿는 것'이다. SNS, 커뮤니케이션 등의 단어보다 앞서 탄생한 것을 감안하면 그 뜻이 약간 통찰 혹은 절창絕唱 같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몸이 전쟁터BattleGround 일 수 있을까? 이번 전시명이기도 한 Red Shirts는 미국대학스포츠협회(NCAA) 풋볼 용어로 본인의 신체 피지컬을 키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급하는 제도를 일컫는다. 스포츠 중 미식축구(이하 풋볼Football)를 전쟁과 가장 유사하다고들 말한다. 조금 터프한(?) 신체접촉 뿐만 아니라 럭비에선 불가능한 단 한번의 전진 패스가 존재함으로써 공성전, 공중전의 영역까지 품는다. 풋볼을 전쟁에 비유하듯 NFL(National Football League)를 지구상 최강의 피지컬 집단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신입생의 절반 가까이가 이 제도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이 종목이 탈인간급의 버거운 신체역량을 요구하는 탓도 있지만 그것이 단순히 대학 신입생이 되는 것을 넘어 사실상 '완전한 노출(露出)'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가령 8월 말에서 9월 초, 풋볼 새시즌이 시작하는데 보통 금요일 고교, 토요일에 대학, 일요일에 프로의 경기를 중계하는데 최근 이 룰이 깨지는 추세에 있다. 대학 경기의 시청률이 프로를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트럼프가 기를 쓰고 대학 개강과 대면 수업을 진행하려는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주인공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그게 불교용어라는 걸 곱씹어보면 노출露出이라는 단어엔 어떤 묘한 매력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적당히 맺고 끊으며 자신의 몸으로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연출 수단이기도 하다. 가령 인스타 공개↔비공개 전환이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건 약간 예측할 수 없는, 미지로부터 날아오는 럭비공의 타격감(打擊感)을 바탕으로 몸을 키우는 피지컬 트레이닝과 유사하다. 일정량의 감정이 흘러넘쳐서 스위치를 건드리면 전원이 툭하고 꺼져버리는, 그러다 다시 그 수위가 낮아지다 못해 마르면 전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이 패턴이 반복되면 마치 '사막'의 갈라진 바닥처럼 이상한 골이 생긴다. 물론 좋게 말하면 마치 가재가 몸집을 키우기 위해 껍질에 쌓이고 벗고를 반복하며 성장하는 것에 빗댈 수도 있겠다.

자신의 내비치는 것의 가장 상품화된 버전을 '자랑'이라고 한다면 자랑하는 건 곧 자신을 가장 즉각적으로 소비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셀럽이 자주 허탈해질수 밖에 없는 건 그들이 파는 모든 게 일종의 '자랑'이기 때 문이다. 즉 그렇게 허탈해지는 스테레오 타입, 사실 그게 그들의 직업이다. 아이러니하게 내가 노출하고 자랑한 아이템들이 나를 좇거나 을러메는 부메랑이 되는 건 순식간이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제 몸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스타에 뭔가 피드를 올렸다 지우고, 그것마저 수동으로 하기 귀찮아 스토리를 활용하고, 계정을 공개↔비공개 전환하는 모든 패턴들이 조금 아프게 말하면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일종의 작은 틱(tic)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은 앞서 얘기한 내용의 일부 혹은 전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가령 정고요나 작가(@goyona_jung_studio / 503호)의 경우 미디어에 의한 노출과 우리가 노출할 수 있는 요소들 중 신체, 취향 등의 속성을 둘러싼 개인의 양가적인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자신의 정체감을 완성하는 동시에 갉아먹게 되는, SNS 상에 노출되는 다양한 정동적 요소들을 캔버스에 그려낸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콘텐츠 중 여럿이 그냥 CCTV 감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을 얼마만큼 시청자들에게 불편하지 않게 연출하느냐가 관찰 예능의 세련됨이고 보는 이들이 진짜 다른 이의 일상을 완전하게 엿보고 있다는 하이퍼리얼리즘의 판타지를 끝까지 깨지 않는 것, 그게 라이브 스트리밍, 혹은 Vlog의 퀄리티다.

BBC, HBO에서 만든 영드는 SF적인 근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 베서니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소녀는 리얼타임 페이스필터 없이는 타인과의 대화조차 힘겨워 한다. 사실 이는 교정해야할 장애가 아니다. 살갗에 덮힌 기관만을 신체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또 다른 폭력 혹은 아집일 수 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아픈 소녀에게 이는 또 다른 얼굴이자 신체의 확장이 될 수 있으며 오세애(@ohseae / 502호) 작가가 이 지점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신체 장기 시험 착장회’를 연다. 이것도 쇼룸이라면 일종의 쇼룸인 셈인데 평소 작가의 주 작업 중 하나인 인스타 필터리얼 매체를 활용하여 실시간으로 방문하는 관객들에게 네 개의 ‘신체 장기’ 필터를 착장해보는 ‘행복한’ 시간을 선물한다.

이정빈(@soojebie / 501호) 작가가 몸을 그려내기까지 많은 굴절 혹은 탈각脫却의 과정이 필요했다. 그가 여성의 살갗과 외연적인 요소, 근육 등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선입견, 편향성에 대해 고민해 왔다. (사실 이는 특정 젠더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녀는 여성의 분만 과정을 그린 한 영국 작가의 그림이 선정성을 근거로 전시를 거부당한 일을 기억한다. 그럼 피부를 묘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형상을 추적할 수 없도록 근육을 그리지 않는다면? 아니 그냥 뼈만 그린다면 괜찮아지는 걸까. 작가의 ‘해골’ 이미지는 그러나 단순히 반대급부의 집약체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고유의 색감을 부여 받고 그 자체로도 결핍된 요소가 아닌 완전한 운동성을 가지고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 맺음을 시도한다. 

오웅진




나는 너를 아직 모른다.

 처음에는 아그네스 오벨(Agnès Obel, b. 1980) 탓이라고 생각했다. 때때로 어떤 음악은 사람을 의식의 깊은 바닥까지 끌어 내리기도 하니까, 뱃속에서부터 목구멍까지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올라와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은 분명 그날 처음 들었던 이 음악, It's Happening Again(Inst.)' 때문이라고 여겼다. 제목부터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은가.

낯선 순간들
 요가를 해 본 사람이라면 '사바아사나(Savasana)'를 알고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서 온몸의 긴장을 풀고 휴식하며 의식만 깨어 있는 자세다. 대부분의 요가 프로그램에서는 마지막에 이 자세를 취한다. '버티는 몸'이라는 이름의 요가 워크샵은 이름답게 극한으로 몸을 밀어붙였고, 그날 '사바아사나'에 돌입했을 즈음에는 이미 탈진한 상태였다. 불이 꺼졌고, 처음 듣는 음악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여러 가지 짧은 장면들이 논리적인 서사 없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음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난 뒤 선생님께 제목을 묻고 당장 그날 밤부터 반복해 듣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집에서 들을 땐 같은 감정이 올라오지 않았다. 오로지 요가를, 그것도 극한까지 버티면서 온몸의 에너지를 다 사용한 뒤 '사바아사나'를 하면서 들을 때에만 다시 눈물이 올라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집에 돌아가는 길을 물음표로 가득 채웠을 즈음이었다. 그날도 요가를 마치고 '사바아사나'를 하며 같은 음악을 듣는데, 전과 같이 뜨거운 것이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평안했다. 이것 또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은 다른 워크샵에서도 몸의 에너지를 전부 사용하고 나서 펑펑 우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고, 하지만 그 이유를 아는 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기나긴 저녁 티타임의 결론은 우리의 몸과 그 안에 담긴 것을 우리 자신도 다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감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감정이나 의문이 올라오면 끝까지 추적해서 무엇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아내는 편이었고, 그것을 이해하고 정리해서 진정시키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지난 시절의 어려운 감정들 역시 그렇게 잘 정돈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머리로 이해해서 잘 보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은 어딘가에 앙금을 남겨 놓았고, 여러 가지 감정의 찌꺼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엉겨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건지 알 수 없는 덩어리를 이루었다. 나도 몰랐던 것이 내 안에 있었고, 이상하게도 몸을 쓰고 에너지를 비워내고, 평소에 생각하던 잡념의 장막을 걷어내고 나자 그 덩어리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음악은 그저 촉매였다.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몸을 단련하는 과정에서 그 덩어리들이 차차 해소된 것이었다.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구성하는 것
 몸과 정신은 도대체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관계일까. 나의 몸이 피와 살과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 외에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도 모르는 성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있다면 나의 정신이나 감정이 남긴 무엇이,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내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퍼포먼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 b.1946)는 초기 작업에서, 정신 에너지에 더욱 집중하는 작업을 준비하기 위해 신체를 먼저 해방시켰다. 비로 '해방(Freeing)'시리즈다. 그는 목소리가 다할 때까지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 해방(Freeing the Voice)> (1976), 몸 속의 기억을 모두 꺼내기 위해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이 전부 소진될 때까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기억 해방 (Freeing the Memory)>(1976),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체의 에너지를 모두 꺼내기 위해 6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신체 해방(Freeing the Body)>(1976)을 시도했다. 에너지를 모두 발산한 신체는 다른 차원에 도달한다. 그때 마침내 영혼에 또 다른 것을 담을 준비가 되었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브라모비치는 가장 신체에 집중한 이 '해방' 시리즈를 마치고 나서야, 반대로 더욱 정신에 집중하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요가로 신체 에너지를 전부 사용한 뒤 '사바아사나'로 이완시키면서 내 마음의 밑바닥에 굴러 다니던 감정의 덩어리들을 마주한 것도 이와 같은 이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정신은 몸을 구성하는 것 중 하나다. 정신이 앞선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몸을 정신을 위한 도구로 여기며 식민화했다. 몸이 아파본 뒤에야 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동을 시작하고 체력이 생기면서 더불어 용기가 생겼고, 그것은 오히려 정신을 더욱 편안하고 건강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몸이 바로 나'라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책 『몸의 말들』 발문 중에서)에 적극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몸은 정신의 보조가 아니라 그 자체로 나 자신인 동시에, 물리적으로 매 순간 나의 현존을 확인하는 증거다.

너를 알아가는 과정
 이렇게 심플하면 좋으련만, 또 너무도 복잡한 것이 몸이다. 보여주고 보여지는 것, 소비 당하고 소비하는 것이자, 사회와 개인 사이, 타인과 나 사이, 각종 권력과 가치의 틈새에 끼어 스스로도 온전히 직시하기 어려운 것이 몸이다. 그래서 '전쟁터'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겪어온 모든 '전쟁'의 흔적이 담겨 있는 것이 몸이다. 내가 지나오고 경험한 모든 것이 나를 만들었고, 그것은 몸의 내부와 외부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쩌면 몸에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드러내고 이야기해야만 한다. 때때로 몸을 바라보는 시각은 타인의 시선, 사회의 억압과 편견에 의해 본의 아니게 분절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밖으로 꺼내 이야기하고 안으로 들여다보고, 외형과 내면을 오가며 합일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몸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 해왔지만, 그리고 지금도 매일 함께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이 친구를 잘 모르겠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미지의 존재다. 그래서 매일 다시, 새롭게 알아간다. 당장 내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번 생에는 나와 몸의 합일을 이루고 싶다. 왜곡 없이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이다.

 '사바아사나'가 끝날 때 즈음, 선생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을 꼼지락거리고, 차례로 팔과 다리를 조심스레 움직이며 몸의 움직임을 느껴보라고, 손끝, 발끝까지, 내 몸의 구석구석 모두에게 잘 있는지 안부를 물으라고 했다. '사바아사나'가 아니더라도 나는 요즈음 종종 내 모 든 것이 담긴 몸에게 구석구석 안부를 묻는다. 정신이 눈치채기도 전에, 나도 미처 모르는 사이 새겨진 나의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본다. 나는 여전히 너를, 몸이라는 가깝고도 신비한 존재를, 그러니까 진짜 '나'를 알고 싶다.

김지연 (@paradisegreen__)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바에 매달려 몸을 접는 운동 토투바. 온몸의 무게를 지탱할 근육이 잘게 찢어지고 채워지기를 반복하여 단단하게 커가는 동안 미세한 생채기는 48시간의 고통을 안긴다. 필연의 아픔은 행위의 성숙함에 따라 점점 범위를 좁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며칠이 흘러도 가라앉지 않는 이상한 통증은 지난날 당신의 자세가 틀렸다는 신호와 같다.

죽은 듯이 매달려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운동이 결코 죽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말끔하게 걷어져 무엇도 겨냥하지 않을 준비를 마친 뼈는 온당한 목표물을 향해 열려있다. 텅 빈 골조의 안과 밖을 부지런히 오가던 물감이 긁히거나 덧입혀지고, 그 뼈마저 통과하여 앞뒤의 풍경과 맞물릴 때 형상은 숨어들어 가면서도 서로를 밀고 당겨 나름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푸른 여름날 바깥의 불편함은 모두에게 허락된 장소가 내게도 그러하리라는 순진한 믿음을 수차례 배반하지만, 여전히 불가능을 모르는 것처럼 자리를 지키고 확장한다. 캔버스 위에 묻어 있는 붓질이 직조해낸 하나의 이미지는 앙상한 연약함으로 구성된 공수의 날카롭고 질긴 다툼이자 생을 붙잡는 의지의 발버둥이다.

폭발하듯 쏟아지는 무례한 이미지의 틈을 갈라 내어 익숙하지 않은 시야를 찾는 피로함은 섬유질 다발의 그것과 닮았다. 앞선 자의 뒤축을 따라 밟거나 올바른 것처럼 들리는 지시를 참고하는 것과 무관하게, 몸에 쌓이는 감각은 오롯이 나의 선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향을 알 수 없는 타격감과 통증은 언제나 지연되게 도착하고 모든 시도에 실패란 없기에, 나는 당신과 내가 무한히 아프기를 기 꺼이 바란다. 돌고 돌아 마주할 - 더 이상 회귀할 길이 없는 곳까지.

이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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