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민/ 작가
몇 해 전에 있었던 한 예술대학의 졸업 전이 떠올랐다. 제목: 《우리의 성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이 말하는 ‘성’은 어떤 의미였을지, 당시 해결되지 않던 의문은, 정빈이 참여한 을지로 OF의 《Red Shirts》 전시를 보며 새롭게 그 뜻이 느껴졌다. 작가란 저마다 자신의 성(城, Castle)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중세의 성처럼 자신만의 요새를 지키고 그 안에서 내정을 가꾸며, 때론 기사를 보내 외부 세계를 탐험하고 새로운 문물과 괴물을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새로움은 믿음과 구전으로 살이 더해지고 부풀어지며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신비감을 전하기도 했다.
정빈은 자신의 요새를 탄탄히 가꾸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살피는 세심한 군주, 고민이 많아 골치를 겪는 군주였다. 멀고도 가까운, 어떤 성의 어떤 군주는 대대로 이어진 역사 속에 자신을 맡기며 그 방식을 따르는 이가 있었고, 어떤 군주는 새로움,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발전에 기대는 이가 있었다. 작지만 소소하게 행복을 꾸리는 성도, 크고 거대해 이름을 널리 떨치는 성도 있었다. 저마다 방식은 제각기 달랐지만, 어떤 군주든 자신의 성을 견고히 구축하며 외부자의 침입에 맞서기도 하고 때론 다른 국과 동맹과 협력을 맺기도 했다. 2019년 《scope scope scope》 때부터 정빈 군주는, 역사가 여성을 바라보고 그려온 방식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해, 현대 여성이 행하는 스포츠의 동작에 대한 섹슈얼적인 시선과 규정짓는 체력적 한계에 대한 반발, 그 두 마음을 ‘붓질’이라는 동작으로 해부해가는 내정을 펼치고 있었다. 작품을 통해 본 정빈의 성에는 뼈와 긁어내기에 대한 신화가 있었다. 신화에 따르면, 여성과 남성의 신체를 구분 짓는 ‘살’을 제거해 ‘뼈’만을 남기기로 하였고 뼈는 정빈 나라에서 주된 운동으로 행해지는 ‘크로스핏’이라는 현대 운동의 동작을 나타내고 있었다. 뼈는 크로마키처럼 배경과 일체가 되어 보일 듯 말 듯, 어렴풋하였고 붓질은 긁어내기를 반복하며 대상을 계속 입히고 지우는 과정을 드러내었다.
정빈국의 초대를 받아 성에 입성해본다. 《Red Shirts》의 성벽이 열리니 정면에 두 점 〈Warm up〉, 〈Toes to Bar #2〉 우측에 작은 한 점의 〈단정치 못한 상자 (Untidy Box)〉, 그리고 입구를 지나 방 안에 세 점의 큰 그림 〈Toe To Bar #1〉, 〈Dead Hang〉, 〈바깥에서(Hors)〉을 마주하였다. 작품 속에서 드러난, 힘차게 뻗은 붓질은 정빈국의 기상을 보여주었고 성을 압도하는 녹색의 향연에선, 겨우내 추운 시기를 견디고 버티어 힘들게 싹 튼 새싹들처럼, 고통을 인내하며 성장하고 나아가려는 군주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푸르고 흰 색감의 작은 그림 한 점, 〈단정치 못한 상자 (Untidy Box)〉는 군주의 초상처럼 곧고 단단하지만, 어딘가 불안한 모습을 나타내었다.
정빈국(정빈國)의 백성들은 군주의 뜻에 따라 붓질과 긁어내기를 주된 노동으로 일삼았고, 저녁이면 모여 함께 크로스핏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든 동작은 언제나 보일 듯 말 듯, 행해졌다. 정빈국의 백성들은 이방인에게 본국의 법과 관습을 친절하고 자세히 일러주는 편이었고 정빈국의 기사들은 끊임없이 외부 세계를 탐험하며 군주에게 다름과 시세(時勢)에 대해 일러주었다. 2020년, 정빈의 성, 정빈국은 봄을 닮은 산뜻하고 밝은 연녹색으로 물들었지만, 그 색을 내기 위해 군주는 많은 고민과 고통을 견디었을 것이다. 다가올 날들에 정빈국의 안녕을 바라본다.
2021.01. 눈 내리는 어느 겨울, 희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