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기획자

 정빈의 그림을 보러 망원동에 갔다. 벌써 한 해 전 일이 된 조형예술과 졸업전시에 방문하지 못했던 미안함을 만회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학교를 떠난 뒤로도 꾸준히 작업을 이어나가는 동료를 그냥 한 번 보고 싶기도 했다. 이런 응원과 축하의 방문이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망원동에 도착해서는 길을 조금 헤맸다. 정빈에게 연락을 취할까도 고민했지만, 말로만 설명을 들어서는 흡사 모눈종이처럼 구획된 주택가에서 지도를 보고 잘 따라온 방향마저 잃어버릴까 봐 그만 두었다. 이미 손님들을 맞고 있을지 모르는 정빈을 귀찮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네이버 지도가 내 위치를 깜빡거리는 빨간 점으로 보여주지 않았다면 아마 골목 안쪽에 있는 ‘예술공간+의식주’라는 작은 현판을 단, 마찬가지로 작은 건물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전시 포스터가 작은 크기로 인쇄된 엽서와, 플로어 플랜 및 짧은 분량의 글이 각각 양면에 인쇄된 리플릿이 허리께 높이의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포스터 2종에는 전시명 <scope scope scope>가 각기 다른 두 서체로 기재되었다. 하나는 둥글둥글하면서 풍만해보이고 다른 하나는 글씨의 골조만 남은 듯 이 가냘프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두 버전 모두 마음에 들어서 엽서 2장을 모두 챙겼다. 입구를 지나 전시장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맨 처음 뒤통수를 내보이고 있는 두 두개골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r>, <R>). 처음 마주하는 두 작품인 만큼 부지런히 고개를 돌린다. 왼쪽 벽에 걸린 그림은 작고, 오른쪽 벽에 걸린 그림은 왼쪽 그림에 비해 크다.


 우리는 해골 이미지가 너무 강력해서 그것을 일종의 기호처럼 사용한다. 여기서 말하는 해골 이미지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아래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이를 훤히 드러냈지만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의 두개골 앞면에 해당한다. 만약 독극물 경고 표지에 해골의 뒤통수가 인쇄되어있다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런 낯섦은 뒤통수가 발생시키는 감각일 테고, 이 낯섦은 인물 형상이 등장하는 전통적인 회화에 대해 생각해 볼 때도 여전하다. 해골이 등장하는 그림이야 그 예시를 모두 들 수 없을 만큼 많다 하더라도, 누가 과연 뒤통수를 공들여 그렸는가? 그 계보를 비교적 근대적인 시기 안에서 떠올린다면 우선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정도가 생각나지만, 그의 그림에 관해 흔히 동원되는 설명을 복기할 때 뒤통수는 역시 새롭거나 낯선 소재임에는 변함이 없다. 게다가 정빈이 그린 이 두 해골은 서로가 낯설기까지 하다. 배치 상 서로를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역시 당연하게도 해골의 얼굴을 살피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재를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도식화된 이해도 차단당한다. 처음부터 사소한 배반을 통과하는 셈이다.


 오른쪽 방으로 들어서면 누워있는 해골과 만난다(<Lying>). 그로부터 멀지 않은,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벽 상단에는 위를 보고 누운 해골의 얼굴 그림이 걸려 있다(<약속에 대하여>). 이 두 해골을 이어진 구도로 상상했다는 점을 정빈으로부터 듣고, 또 한 번 그가 작은 배반을 의도했다고 생각했다. 작은 공간에서지만, 우리는 결국 각 작품의 배치에 있어 어떤 늘어진 사이가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Lying>의 맞은 편 벽에 걸려 있는 <Jogging>은 전시된 정빈의 그림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공원의 산책로 위를 뛰고 있는 해골은 그 크기가 나의 몸과도 거의 포개어질 만하다. 우리가 이미지를 독해하는 방식에 대한 배반은 <Jogging>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화면의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이어지는 대각선의 스트로크는 화면 전체에 어떤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원을 가로지르는 산책로는 이와 같은 유도를 놀리는 듯 화면 오른쪽으로 산뜻하게 돌아 나간다. 그 위를 뛰고 있는 해골이 조깅을 이어나간다면 그 역시 화면에서 곧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에서 부동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공원과 산책로, 나무와 하늘을 비추는 화면의 구도다. 그런데 이 구도와 배경이 어떻게 선택된 것인가 하니, 정빈은 “레깅스 입은 여성의 신체를 불법으로 촬영한 범죄행위와, 이에 대한 처벌 여부를 판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검·경의 미숙한 대처를 고발하는 기사가 채택한 대표 사진”이 <Jogging>이 참조한 원본임을 밝혔다. 혐의를 고발하면서, 고발하는 사진은 혐의로부터 안전한 모순. 이때 <Jogging>은정빈의 다른 그림들이 행하는 것에 비해서도 훨씬 강력한 배반의 형식을 보여준다.


 사건사고에 대한 소식을 텍스트로 기술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주어지는 정보도 문제지만, 텍스트를 대체할, 또는 보충할 요량으로 각 소식지가 빌려오는 축자적인 이미지는 더욱 문제다. 주어진 사실을 전달하는 방법과 그것에 대한 강조의 방식이 매체마다 상이한 와중에도, 텍스트는 필요이상을 전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떤 이미지들은 그것이 아예 필요 없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예된/ 배제된 윤리적 질문의 빈자리를 결국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되는 지난한 반복만큼, 우리를 무력감과 배신감에 몰아넣는 일도 드물다. 이런 문제적인 질문을 경유해서 우리에게 도착한 정빈의 그림이, 해골이 아닌 레깅스 입은 신체를 화면 위로 다시 불러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JAR>에 대한 언급은 빠져있지만, 전시장을 돌아 모두 확인한 그림들은 평면적인 듯 하면서도 분주하고, 안정적인 듯 하면서도 대범했다. 상반된 감상을 한 문장에 섞었으나 하나의 캔버스 위에서도 손을 더 거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나란히 놓이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주 게으르거나 안온한 묘사는 아닐 것이다. 사실 자기가 그린 그림을 공개된 장소에 열어두는 것 자체가 대단히 용감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대범함이란 그림의 크기나 전시의 규모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의도하는 어감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것이기도 하다.



 이날 정빈은 내게 2분(무려!)이라는 매우 짧은 관람시간을 허용했지만, 그 뒤 이어진 대화는 대략 2시간 정도 이어졌다. 그리고 전시장을 떠난 직후 남긴 메모에, 그림 외의 이야기도 상당한 분량으로 오고갔던 이 시간에 대해 “충분히 수다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필요하지 않은 말은 하나도 없었던 즐거운 대화”라고 적었다. 아래로는 급하게 마련된 ‘작가와의 대화’에서 정빈이 특별히 강조했거나 그의 그림에서 내가 각별히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 적어 보았다.



<데크레셴도의 여정>



 전시를 방문하고 난 뒤 정빈은 내가 나온 몇 장의 사진과 짧은 영상을 보내왔다. 영상이 끊긴 시점부터 이어지는 말은, “죽었으니까 해골이고 해골이니까 죽은 것인데, 베개를 베고 누운 이 해골은 눕기 직전까지 살아있었다가 눕고 나서야 죽은 것 같”다는 나의 즉각적인 감상이었을 것이다.


 정빈은 이 그림(<약속에 대하여>)에서뿐만 아니라 전시된 그림에서 고르게 확인할 수 있는 형상을 두고 거듭 “뼈”라는 낱말을 사용했다. 그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면서, 처음엔 이 형상을 “해골”이라고 불렀던 나 역시 점차 그것을 뼈라고 부르는 데 친근해졌다. 해골은 해골이 지시하는 죽음이라는 관념과 너무 밀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뼈는 우리가 해골로부터 얻는 죽음에 대한 감각에서 조금 비켜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해골을 얻지만, 뼈는 살과 장기가 엉겨 붙은 “산” 몸에서도 감각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발목에서 몸 바깥쪽을 향해 유난히 튀어나온 부분을 더듬어 복사뼈라고 하지, 발목 부근에서 나의 해골이 만져진다고는 하지 않는다. 죽음은 언제나 감각의 정지거나 감각 이상의 것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해골과 비교해 뼈는 더욱 신체적이다. 뼈는 살아있는 몸을 지탱하고, 빽빽한 밀도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자라기까지 한다. 즉 해골은 완료형이고 뼈는 현재형, 또는 진행형에 가깝다. 인간의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생각해 보아도 뼈는 언제나 튼튼할 것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해골이 튼튼하다거나 “해골도 못추린”다는 구문을 상상하면 입가에 왠지 모를 실소마저 번진다. 그러니까 해골은 부서지는 것이고 뼈는 부러지는 것이다. 이것은 무리한 일반론일 수도 있겠지만, 모쪼록 해골과 뼈에 대한 조금씩 다른 견해는 결국 단단함에 대한 감각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런 단단함에 대한 감각은 물렁함에 대한 감각도 가능하게 한다. 내가 정빈의 그림에서 계속 마주하는 것은 이런 “물렁한 뼈”다. 뭉글뭉글하고 살구색이기도 한 뼈.
 

 그래서인지 그가 그린 뼈는 한결같이 살아있다. 오히려 살아있는 뼈가 전시의 한 결을 이루고 있다고도 하겠다. 성별과 연령에 대한 판단을 몸으로부터 분리하고, 그 중립지대로서 정빈이 선택한 소재로서의 뼈. 각 그림에서 슬퍼하기도 하고, 누워있기도 하고, 가볍게 뛰어다니기도 하는 뼈. 이때 “뼈”를 “사람”으로 바꾸어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까닭은 다시 한 번, 그가 그린 뼈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빈이 회화라는 매체를 지속적으로 상대해 오면서 어떤 소재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해 웹상으로만 얼핏 본 정빈의 졸업 작품에 대해 “벽을 만들었네!”라고 한동안 생각했는데, 오늘 대화를 통해 그것은 종이를 그린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취약한 물성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유연하기까지 한 종이를 보고 나는 왜 벽을 떠올렸을까?


 여기 막 완성된 그림이 있고, 이 그림을 지금과 달리 그려질 수 있었던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채택된 결정적인 장면으로 파악한다면, 이런 장면은 결국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상대하는 내가, 즉 그림 그리는 내가 어느 자리에 서서 그것을 숙려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부터 “~의 시선”이나 “태도” 같은 말도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정빈의 시선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전시를 통해 소개한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정빈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했다. 세 가지 원칙을 따라가며 정빈의 전시를 다시 본다면 지금과 또 다른 차원의 감상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귀여울 것”이라는 마지막 원칙만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원칙을 자신의 그림이 “모두 같은 레이어로 그려지길 바란”다는 그의 궁극적인 소망과 함께 읽으면, 종이를 그린 이전의 그림과 뼈를 그린 이번 그림을 일종의 연작처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1년 전의 그가 평면인 종이를 그림으로써 위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길 바랐던 것이라면, 이런 마음조차 어딘지 모르게 귀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귀여움은 처음 품은 호기심과 목표를 끝까지 유지하면서도,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 실험을 계속하게 만드는 지혜로운 미숙함과도 같다. 그러므로 정빈이 귀엽다는 것이 아니라―정빈도 물론 귀여운 사람일 수 있으나―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료와 기법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 느껴지는 어떤 단단함을 강조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단단함이야말로, 종이를 그려서 벽을 만드는 정빈의 독특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단단함에서 물렁함으로의 이행, 크고 작음의 대비, 함께 전시를 올린 작가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 위로 드리우는 끼어들기의 실험 등을 통해 정빈이 이루어낸 다양한 감각의 변주는, 그의 그림과 이번 전시를 마치 하나의 악곡처럼 느껴지게 한다. 글에 소제목을 달며 악상기호를 떠올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만약 정빈과 그의 그림에게 크레셴도라는 주문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것을 ‘단단하게’, ‘두껍게’에 대한 요청으로 바꾸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두께를 가지게 된 종이 그림에서 우리가 책의 물성을 상상할 수 있다면 무리일까? 책은 펼칠 수 있고, 원한다면 덮는 것도 가능하다. 펼쳤다가 덮으면 머물렀던 자리를 헤매게 된다. 더불어 종이가 한 장 한 장 쌓여 완성되는 책의 구성 방식을 상기할 때, 정빈이 강조하는 ‘레이어’라는 독특한 개념도 훼손되지 않는다. 한편, 앞서 언급한 펼치기, 풀어헤치기, 덮기의 반복은 그가 재료와 색을 사용하는 방법에까지 연장된다. 물감이 수분을 많이 머금게 해서 ‘얇게’ 그린 다거나, 건조될 때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흰색을 사용하는데 따르는 고충을 털어놓는 정빈의 조바심을 톺아볼 때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면 정빈의 종이 그림은 아무래도 “벽” 보다는 “책”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물론 벽 다음으로 단단하고, 평면이며, 한 층으로 이루어진 것은 떠올리기 어렵다. 그러나 “가령 우리가 벽을 밀 때, 그 미는 힘은 동시에 벽이 우리를 미는 힘이다(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빈과 그의 그림에 새로운 주문이 주어졌다. 나는 이번에는 이것을 데크레셴도에 대한 요청이라고 읽고 싶다.


 정빈은 종이 다음으로 그리길 원했던 소재가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림의 소재로써 사람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소재다. 사람은 때로 사물 같지만 스스로 움직이기도 하고, 충분히 입체적이기도 하다. 만약 100명의 다른 사람을 그린다면 그림의 개별성 역시 그 수에 비례하여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빈은 사람에게서 얻어지는 구체성을 제거한―보다 신체적인 의미에서의―어떤 몸을 상상하고, 몸을 채우고 구성하는 ‘고기로서의 살’도 다시 이 몸과 분리한다. 그리고 남은 앙상한 뼈를 화면 위로 불러왔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레이어’에 대한 고민이 이 뼈를 소환하는 과정에서 소거된 몇몇의 꺼풀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Lying>에서 우리는 가지런히 놓인 뼈의 표면에 생채기 자국 같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긁히고 마모된 뼈를 묘사하기 위한 표현인가 했더니, 정빈은 이것이 그의 손톱으로 그림 표면을 살짝 긁어 만든 결과라고 했다. <Jogging>에도 이처럼 아주 얕은 깊이로 파서 만든 자국들이 있다. 양끝이 둥근 뼈다귀 모양을 작은 크기로 새겨 놓은 부분이 그것이다. 내가 정빈의 종이 그림과 뼈 그림을 일종의 연작처럼 상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면의 깊이를 아주 세밀한 차원에서 조정하기 위해 어떤 부분만 남겨두고 그 주위를 칠하기도 하고, 바로 그 부분을 손톱으로 파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는 대상이 종이보다는 입체적인 뼈가 되었지만, 정빈의 그림은 여전히 두께와 낱장 사이에서 진동한다.


 정빈과 나눈 짧지 않은 대화는, ‘그리기’라는 행위에 있어 그만의 고유한 기법을 터득하여 정립하는 일에 대한 강한 열망이 그에게 있음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회화에 매진하는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겠지만, 우리는 이제 막 학교를 떠났거나 떠날 예정인, 그 이후의 삶을 막 시작하려는 사람들이고, 그 시작을 착실하고 충실하게 행하고 있는 사람이 나의 동료이기도 해서 기쁘다. 나는 정빈에게 그런 기법을 찾으면 그 자체로 작가의 서명이 될 테지만, 그것은 곧 더 이상 새롭게 제작할 그림이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환희의 순간이 가능하다면, 그때는 아마 작가로서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의 물리적인 죽음도 머지않았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는데, 이 농담이 정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떤 음악이건 시종일관 크레셴도로만 진행된다면 그것의 미래는 결국 음의 파괴일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모든 곡이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데크레셴도로 나아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 다음으로 새로운 소리의 공간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도 여기서 발생한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교수의 학설을 학생들은 웃어넘겼지만, 한 학기 동안 침묵을 고집했던 교수의 수업이 끝나자 다음 학기부터는 학생들 모두가 “모든 소리를 더 잘 듣게 되었”다는 기형도의 시를 기억한다(기형도, 「소리의 뼈」). 그러므로 계속해서 무엇의 뼈를 찾아 움직이는 정빈의 마음을 응원하다. 그런 데크레셴도의 운동을 지지한다. 그림의 완성 직전까지도, 무엇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매순간 새롭게 받아들이는 처음이 지속되길. 그렇다면 정빈의 다음 대답이 무엇이든 나는 벌써부터 그의 작업을 위한 증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                  

© Lee Jungbin 2023